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탠리 매튜스 (문단 편집) === [[블랙풀 FC]] === 2010-11 시즌 블랙풀의 행보를 지켜본 축구팬은 알겠지만, 블랙풀 역시 스토크 시티와 다를 것 없는 약소팀이었다. ~~대체 왜 이런 약팀들만 골라다닌건가...~~ 당시도 마찬가지였고 1부 끝자락과 2부를 왔다갔다하느라 바쁘던 팀이었는데, 그런 팀이 '''매튜스가 합류한 1947-48시즌에 곧바로 [[FA컵(잉글랜드)|FA컵]] 결승전까지 올라간다'''. 비록 상대였던 [[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|맨체스터 유나이티드]]에게 패배(2-4)하긴 했으나 지금 생각해도 블랙풀로서는 기적에 가까운 성적이었다. 당시 블랙풀의 감독이었던 조 스미스[* 블랙풀에서 23년간 감독 생활을 하였다.]는 매튜스를 중심으로 팀을 맞춰주었고, 매튜스에게 피치의 모든 권한을 일임하다시피 했다. 그렇기에 해당 시즌에 최초로 제정되었던 '''FWA 올해의 선수상의 첫 수상자'''가 스탠리 매튜스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. 즉 '''잉글랜드 1부 리그가 제정한 최초의 시즌 MVP'''가 된 것이다. 이후 1부 리그 잔류는 물론이요 1950-51시즌 다시 한 번 FA컵 결승에 팀을 이끌었다, 하지만 [[뉴캐슬 유나이티드 FC|뉴캐슬]]의 재키 밀번의 두 골에 밀려 다시 준우승(...) ~~이분도 은근 콩라인이시다~~ 그리고 1955-56시즌 최종성적은 '''1부리그 2위'''. 블랙풀 클럽 역사상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본 성적이다. 신예 라이트 백 지미 암필드와 함께 한 오른쪽 측면은 당시 어떤 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으며 당시가 되었던 지금이 되었든 블랙풀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못 했을 성적이었으니 블랙풀 팬들로서는 눈물까지 흘릴만한 발전이었고 그들에게 스탠리 매튜스는 영웅 그 자체였다. 이것이 매튜스와 블랙풀 커리어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했다. 블랙풀은 1952-53시즌 다시금 FA컵 결승전에 오른다. 상대는 [[볼턴 원더러스 FC|볼턴 원더러스]]였는데,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동료이자 신예 스트라이커였던 [[냇 로프트하우스]]와의 맞대결로도 관심을 끌었다. 하지만 후반 15분 정도가 되었을 때의 스코어는 1-3. 천지가 개벽할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블랙풀이 승리할 일은 없어 보였다. '''그런데... [[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|천지가 개벽했다]].''' 스탠리 매튜스의 스피드 그리고 시대를 앞서갔던 드리블과 절묘한 패스는 기세등등하던 볼턴 수비진의 틈을 노리기 시작했고, 후반 23분에 그 첫 결실이 나왔다. 매튜스는 치고 달리기로 볼턴의 왼쪽 측면을 파고들다가 크로스를 날렸는데 그 크로스를 볼턴의 골키퍼 스탄 한센이 놓치고 말았고, 뒤에 있던 [[스탄 모르텐슨]]이 밀어넣어 추격의 불씨를 마련하였다. 그리고 경기 종료 직전, 블랙풀이 프리킥을 얻어냈고 [[스탄 모르텐슨]]이 키커로 나섰다. 모르텐슨은 강력한 킥으로 골을 성공시켰고 [[해트 트릭]]을 완성하였다. 그렇게 스코어는 3-3 동점이 됐다. 그리고 인저리 타임, 볼턴의 왼쪽 측면을 초토화시키던 매튜스는 다시 한 번 볼턴의 수비수 랄프 뱅크스를 순간 스피드로 제치고 기막힌 패스를 찔러넣어 주었다. 그 패스는 아웃사이드 레프트 빌 페리의 발에 걸렸고 상황은 종료됐다. 최종스코어 4-3.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i.telegraph.co.uk/stanley_matthews_1449538c.jpg|width=100%]]}}} || || '''{{{#ffffff “The Matthews Final” }}}''' || 블랙풀의 클럽 역사상 처음이자 현재까지 마지막인 우승 타이틀이었고, 매튜스의 승리였다. 종가의 상징인 [[웸블리 스타디움]]에서, 세계 최고(最古)권위를 자랑하는 잉글랜드 FA컵 파이널 무대에서의 위대한 승리. 이 때 매튜스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[[해트트릭]]까지 기록하여 역전승의 발판을 마련한 센터 포워드 [[스탄 모르텐슨]]의 활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경기는 현재까지 '''“매튜스 파이널(The Matthews Final)”'''로 불린다. 그리고 그 때 그의 나이 '''38살이었다.''' 그리고, 이 때부터 매튜스는 그야말로 나이를 거꾸로 먹기 시작한다. [[파일:external/cs411020.vk.me/BDjdhE4CaAI.jpg]] 그리고 상술했던 1955-56시즌. 유럽 최강자를 가리자는 취지의 [[UEFA 챔피언스 리그|유러피언 컵]] 이 처음으로 기치를 올린 시즌이었다. 또한 그에 발맞춰 프랑스풋볼紙가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상, 즉 [[발롱도르]]가 처음으로 제정된 시즌이었다.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축구판 최고의 영예를 최초로 차지한 플레이어가 바로 '''나이 40살의 스탠리 매튜스'''다.[* 당연한 이야기지만 매튜스는 '''역대 최고령 발롱도르 수상자'''로 기록되어 있다. 이것 역시 축구계에서 불멸의 기록 중 하나로 손꼽히는데 일단 축구 역사를 통틀어서 40살까지 발롱도르는 고사하고 팀에서 주전급으로 활약했던 선수가 몇 명이나 되는지 생각해보자. --40세는 커녕, 20대 후반들도 팍팍 나가떨어지는게 오늘날의 축구다.--] 당시 매튜스와 함께 최종후보 3인에 오른 플레이어들을 보면 더욱 입이 벌어진다. 한 명은 바로 그 유명한 '''[[알프레도 디 스테파노]](Alfredo Di Stefano)'''[* 당시 투표 결과는 매튜스가 47점, 디 스테파노는 44점으로 상당히 박빙이었다.]였고, 또 한명은 프랑스의 원조 레전드 플레이어라 불리던 '''[[레몽 코파]](Raymond Copa)'''였다. 심지어 이 둘은 해당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([[레알 마드리드 CF|레알 마드리드]] VS 랑스)에서 맞붙은,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톱 플레이어였다. 최초의 유럽 챔피언 타이틀을 놓고 겨루던 두 클럽의 에이스를 뒤로 하고 잉글랜드 리그 2위에 간신히 턱걸이한 블랙풀의 '''나이 40 스탠리 매튜스'''에게 갓 만들어진 황금공이 돌아간 것이다.[* 다만 이 수상은 매튜스에 대한 경의의 의미에서 받았다는 의견도 있다. 당시 디스테파노는 30살의 나이로 라리가 득점왕에 오르고 레알 마드리드를 유로피언컵 초대 우승팀으로 이끌었다. 그런 디 스테파노가 당시 매튜스보다 못했다고 말하는건 다소 힘든 감이 있다.][*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당시 초회차 대회를 치른 유러피언컵의 위상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는 점이 꼽힌다. 더욱 긴 역사를 가진 FA컵이나 영국의 1부 리그의 권위가 외려 이제 막 시작된 유러피언컵을 상회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. 실제 FA에서는 54-55시즌을 우승하여 1회 유러피언컵에 초청받은 [[첼시 FC]]에게 격이 떨어지니 참여하지 말라는 권고를 했고, 첼시 역시 군말없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.] 스탠리 매튜스는 1961년, 스토크 시티 복귀를 선언한다. 1961년 시즌 [[아스날 FC|아스날]]과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블랙풀에서 440경기 출전의 기록을 남겼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